산다는 그것/♣가르치며 배우다

<거룩한 식사>를 통해 본 자화상, 구운지몽

붕정 2009. 8. 5. 21:40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대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강의용 논술 문제를 만들면서 '현대 사회에서 소외 문제'를 다루었다.

   시 <거룩한 식사>는 제시문으로 활용을 했다.

 

'라면발', '찬밥', '국밥'이라는 낯설지 않은 시어에서 우리 시대의 소외를 생각해 본다.

황지우 시인의 <거룩한 식사> 시 전문에서 나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뜯어본다.

분식집에서 등 돌리고 앉아 혼자 라면을 먹고 있는 나이든 남자는 누구일까.

순대국밥집에서 혼자 국밥을 입 안 가득 떠넣고 있는 노인의 모습은 결국 누구일까.

 

노동에서도 소외되고 삶의 경계에서도 소외되어

하루하루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자루 씻는 그들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인가.

등 돌려 혼자서 먹는 라면을 국물까지 후루룩 마시고 있는 그,

메뉴판을 가린 그의 등에서 삶의 고단함을 읽는다.

'밥'이 '법'을 앞선다.

 

어른이야 배고픔을 물 배로 채운다지만

21세기는 배부른 정보화의 그늘 아래서 '법'보다 '밥'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다.

같이 놀던 아이를 부르는 소리, '철아, 밥 먹고 놀아라!'

그러나 '밥'이 무서운 아이는 어디 숨을 곳조차 없다.

 

'밥'은 목숨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축적의 방식을 이미 터득한 사람들에게는

물에 찬밥 말아 풋고추를 된장 푹 찍어 와삭 베어 문 것이 추억이겠지만

고스란히 서러움인 등 돌린 그 남자에게는 찬밥 한 그릇이

신성불가침한 권리이자 가치가 된다…….

 

*경기도 김상곤교육감님의 급식 예산을 정치적 이해 관계 없이 지원해 주길 바랍니다.

 

-급식비를 내지 못해 점심 시간에

친구들은 모두 급식실로 점심 먹으러 우르르 달려갈 때

교실에 혼자 우두커니 남아 앉아

가난을 원망하며 구겨진 어린 자존심을 곱씹으며

왜 나를 낳았는가 하며 부모를 탓하는 아이가 없는 학교이길 바랍니다.

 

어린 학생들의 마음에 주홍글씨 '가난과 원망'을 새기게 하는 것보다는

'희망'을 위해 커가도록 해 주는 것을, 정치적 논리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급식실 배식구 앞에서 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덩달아 즐거운 점심 시간이 되어 한껏 웃음 띤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친구들과 오늘 점심 메뉴는 이렇고 저렇고 수다떨며 구김없이

맛있게 점심을 먹는 기회를 앗아가는 일은

예수도 석가도 마호메트도 할 수 없는 거룩한 일입니다.

 

경기도 김상곤교육감이 요청한 급식비 예산을 조건 없이 마련해 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