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그것/★메아리의 힘★

진실 혹은 거짓 (Nothing But The Truth, 2008), 구운지몽

붕정 2010. 7. 21. 23:33

 

진실 혹은 거짓 (Nothing But The Truth, 2008)

장맛비가 지나간 자리에 당연하다는 듯 자릿세를 걷어가듯

찌뿌덩한 더위가 밤에 더 기승을 부릴 것 같다. 초복노릇하는 것인가.

보신탕, 삼계탕을 좋아하건만 진한 국물 냄새도 맡지 못하고 지나갔다.

 

로드 루리 감독의 냉철한 수집가의 모습을 주인공 케이트 베킨세일이

잘 보여 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짜임보다는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하려는

측면이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영화는 결국 다 보고 나면 현대 사회의 단면을 파헤치는 다양한 효과를 알게 된다.

이 영화가 시작되고 집중하다 보면 인스턴트에 익숙해지고 디지털에 자꾸자꾸 손이 가고

마음을 빼앗긴 호모 디지탈레안스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잠시 딴짓도 서슴지 않게 하는 영화라는 것을 보면 상업적으로는 잼병이다. 그렇지만

아예 창을 닫을 수는 없다. 설마, 감독이 이것을 노린 것은 아니겠지.

버스 안은 어린아이들 노래 소리와 떠드는 소리, 레이첼 암스트롱과 아이의 대화를

놓치고 지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졸음겨울 것이다. 그것은  필름과 필름 사이, 행간을

읽게 하는 단서가 됨을 감독의 편집 기술로 보여 준다.

 

대통령의 저격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생각보다 흥미롭게 펼쳐지지 않는다.

레이첼은 일일 교사를 자청한 저널리스트이다. 착한 티미를 사랑하는 엄마이기도 하다.

여자아이가 친구의 괴롭힘을 고자질한 것을 본 티미는 "고자질쟁이"라고 놀린다.

티미 : 고자질하면 나쁘잖아요.

레이첼 : 그렇다고 고통을 참아야 되는 것은 아니잖니.

티미 : (아이들은 착하다.) .......

여기서 여자아이는 결국 내부고발자가 되는 것이고 같은 반 친구(사회 구성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한국 사회는 한때 충(忠)과 효(孝)를 동일시해 왔다. 충이라 함은 2차적 계약 관계이므로 1차적 관계인 효보다 우선시 될 수 없다.

충을 1차적 관계인 효에 대입시키는 효과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다.

부모형제의 잘못을 고발하지 않은 것은 법으로부터도 보호받게 되어 있다. 그것을 충으로 대입시키면 국가의 잘못을 보고도 못본 체 하라는 것과 같다. 물론 거기에는 출세라는 보상으로 대체된다.

개인의 출세는 달성했는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인간적으로는 비겁한 짓이고 죄를 지은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사고 방식이 사회 전반에 고정 간첩처럼 암약하고 있다. 이제는 모든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악용하고 있다.

얼마나 숨막히는 아이러니인가. 충효일치는 구호처럼 외치면서 진리와 진실을 얼마나 호도했는가 말이다.

영화는 자유민주주의 심장 미국이고, 언론 자유의 기치를 숭고하게 여기는 미국의 저널리스트가 주인공이다. 

왜 사회는 항상 지식인들에게 책임을 물을까?

왜 지식인들은 낙관적 전망보다는 낙관적 우려를 먼저 할까?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은 진실보다는 거짓을 먹고 자란 거대한 공룡이다.

권력은 거짓이 없으면 그 힘을 잃게 된다는 아이러니이다.

최근의 일 가운데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경우도 거짓말이 낳은 공룡의 무차별적인 폭력이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악순환의 고리를 미국 공룡은 보이지 않는 손을 이용하고 있다.

국가 권력, 국가 안보라는 미명하에서 소리 없이, 때로는 무조건적으로 개인의 인권은 무참히 짓밟히게 마련이다. 영화는 미국이라는 사실에 그보다 열악한 나라의 경우는 어떻겠는가를 반문하게 만든다.

 

더 무서운 것은 국가 권력은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레이첼의 감옥살이 중에 언급된 정보국 여성 요원은 극우주의자의 총탄에 횡사하게 된다.

이러한 비겁하고 무서운 방법을 어떻게 잘 사용하느냐에 따라 통제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도 그렇고 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도 보이지 않는 손이 결국은 조정하는 것이다.

'당신도 예외일 수 없으니 국가 안보에 대항하지 말라.'는 거짓 공룡의 대국민 협박이나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생각보다 지루하게 진행된다. 아마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것 같다.

이러한 재미 없는 영화의 구성과 전개는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정치는 생각하는 일이다.

 

레이첼을 돕는 변호사의 말을 통해서 국가 권력은 재판관의 입을 통해 신념을 포기하라고 한다.

"신념을 저버림으로써 얻는 대답은 올바른 대답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국가 권력이 

그렇다고 그냥 가만 보고 있지는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시의 적절하게 써먹는 수법이 있다.

힘있는 국가와 약소국 간에도 작용하는 가장 기본이 바로 경제적 핍박이다.

더 나아가 가장 비열한 방법이지만 효과가 원자폭탄보단 더 쎈 방법으로 가족들을 볼모로 잡는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는 가족의 해체까지도 서슴지 않고 협박으로 악용한다는 것이다.

실제 영화에서는 레이첼은 구속 상황에서 양육권 다툼까지 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레이첼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아들과 웬수같은 남편에게 돌아갈 것인가.

레이첼의 신념... 정보원을 공개만 하면 그냥 풀려난다. 정보원은 정말 누굴까.

 

구속된 감방에서도 보이지 않은 손은 있다. 시비거리가 되면 레이첼에게 불리하고 억울한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3류 영화 속에서 두목을 테러한 자에게 보복을 하듯이 하지만 감독은 이것을 일부로 크게 다루지 않는다.

한 개인의 신념이 얼마나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레이철에게 아킬레스건은 감옥에서 테러도 아니고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도 아니라 아들 티미다.

 

영화 속 레이첼의 기자 정신으로만 해석한다면 나무만 보는 격이다. 아니다 영화를 보다가

잠을 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나'와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도 예외가 아님을 알게 될 때

많은 것이 되돌릴 수 없는 상태에 있을 수 있다.

 

영화  <진실 혹은 거짓>과 함께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언싱커블(Unthinkable, 2010)>을 통해

현대 사회가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테러는 강자나 약자나 두루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9.11테러 이후 미국 사회에서 목청을 드높였던 테러와의 전쟁이 주요 내용이다.

이 영화의 압권은 대테러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작전의 성공이 아니라 테러범에 대한 고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섬뜩할 정도로 영화는 전개되고 눈을 뗄 수 없게 긴장감도 조성한다. 고문전문가 H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나도 저런 고문전문가가 되어 같이 고문하게 되는 느낌을 갖는다. 사무엘 잭슨이 H의 연기를 냉혹하게 잘 한다는 것으로 위로한다.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FBI 특수 요원인 브로디의 인간적 사고가 어떻게 무너져 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언싱커블>에 대한 것은 많이 언급된 것 같아 참고될 만한 곳을 알려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http://bopstory.tistory.com/1710?srchid=BR1http%3A%2F%2Fbopstory.tistory.com%2F1710

 

또한 오래된 영화인데 남미 니카라과이의 독립을 다룬 <언더 파이어 Under Fire>는 일부 삭제된 부분이 있었지만 KBS에서 한 번 상영했습니다. 인권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다시 한 번 봐도 좋을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던 내부고발자였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여러분들이 직접 영화를 보고 살도 붙이고 여백에다가 낙서도 하길 바랍니다.

이와 관련해... 관습, 명분,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형성되어 인간의 존엄성을 갉아먹는가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걸리버여행기>를 통해서 우리가 방심하면 얼마나 큰 재앙으로 우리 스스로를 옭아매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물론, 논술 학습 자료로 매우 좋습니다. 한 편으로 10편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자천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