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그것/◑보내는 마음 沿

산(山)... 그대로를 받아들이다, 구운지몽

붕정 2009. 7. 20. 18:25

 

금이야 우리의 산과 산맥에 대한 관점이 20세기 말 포스트모더니즘의 거센 영향으로 달라졌다.

70~80년대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이라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알게 모르게

고토 분지로, 야스 쇼에이의 영향을 받은 일본식 산과 산맥을 앞다투어 외워가며 공부했을 것이다.

정말 우리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체'에 걸러지지 않은 채로 '산'과 '산맥'을 외우곤 했었다.

100년이 지나, 이제는 학계의 노력으로 백두대간에 기초한 우리의 산과 산맥을 가슴으로 품게 되어 다행이다.

 

 

국인들에게 산이란 무엇일까. 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모든 나라에 있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의 산은 일본의 '야마(山)'와 다른 나라들의 '마운틴(mountain)'과는 사뭇 그 관점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나와 같이 세상에 지친 사람들이 산을 찾기도 하고 산에서 위안을 받기도 한다. 때론 도시의 콘크리트와 까만 아스팔트 위에서는 도무지 찾지 못하는 지혜를 얻기도 하는 곳이 산이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의 산처럼 많은 시간을 투자해 일생 일대의 일인 양 큰 마음을 가지지 않아도 훌쩍 작은 배낭으로도 찾을 수 있는 곳이 한국의 산인 것 같다.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문화가 각각의 삶의 양식을 반영해 드러나는 것처럼 산 또한 그 나라 사람들에 따라 다른 관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리스 로마 병사들이 점령한 제국에서 산해진미 가득한 승전의 테이블에서도 돌아서서는 '우리의 썩은 생선소스 맛이 최고야.'라고 했듯이, 한국의 산이 봄여름겨울 그리고 가을의 옷을 입어 정답고 그리운 대상이다.

 

 

은 내가 어떤 수식어로 재단을 하더라도 생활의 대상이었고, 기복적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 산은 정복의 대상이기도 했으며,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기도 한다.

우리에게 산은 예부터 낳는(始와 開) 역할을 담당했던 산이었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산은 국가를 만들고 한민족을 낳은 역할을 했다. 우리의 모든 어머니들은 삶의 가장 소중한 선물인 자식의 점지를 산에서 얻어 왔다. 우리 모두는 결국 산에 빌어 낳은 자식들의 후예들인 셈이라 한다.

 

 

리의 산은 삶과 정신(生과 精)이 깃들어 있다. 우리들은 의식주 모두를 산에 묶어 두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삼간을 지어내'도 들 한가운데가 아닌 한 뼘 산에 의지하듯 등을 맡기고 앉아 물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안식을 느끼는 우리네였다.

어릴 때 처음 그린 그림이 어머니 등처럼 포근한 산이었다. 이 땅의 멋이라는 것과 가락이라는 것 모두가 산과 더불어 되지 아니한 것이 없다. 산과 물이 어우른 곳에 독특한 한국 문화를 잉태하게 하였다. 또한 근대 교육이 실시되면서 애교심과 정체성을 갖기 위해 교가를 제창하게 했는데, 그 교가 속에도 엄연히 우리의 산은 늘 우리를 자랑스럽게 만든다. 우리의 교육은 산의 정기부터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리는 지식을 쌓거나 도를 닦으러 산으로 간다고 한다. 산은 무형의 재산조차도 아무 거리낌 없이 구하는 자한테 퍼주는 성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우리는 도시 생활에 찌들고 지쳐 아픈 머리를 식히기 위해 산으로 간다. 그러면 산은 말 없이 찌든 상처를 흐르는 시냇물에 이끼를 돌보듯 말끔히 치유해 준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눈을 약간만 돌려 보면 거기에는 차가운 네온사인 밑에서는 얻을 수 없는 상상과 여유를 얻어 오기도 한다. 산이 보여 주는 것에는 아무런 채색이 되어 있지 않다. 그것에 색을 입히고 치밀하게 계산하고 21세기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 산은 언제나 밑진 장사를 해도 부처인 양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산은 그렇게 많은 부처를 산 속에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명당 자리에는 욕심 많은 예수도 들어앉고 싶은지 으름짱을 놓는 예수에게 요즘 한국의 산은 자리를 내준다.

 

 

리의 산은 쉬는(死와 輪) 곳이다. 요즘은 산에 간다, 산에 다녀왔다 하면 명품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랑하고 산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지 화장으로 채비하는 등산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산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들에 있는 얕은 산의 부모님 산소를 다녀오고도 "산에 갔다 왔다."고 했다. 반공이 국시가 되면서 이른 아침 신발에 황토가 잔뜩 묻어 있으면 간첩으로 신고해야 하는 두려움의 시대가 수많은 죽음을 만들어 내기도 했던 아픔을 지닌 산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매장 문화가 변하긴 하더라도 산은 여전히 우리들 부모님의 집이다. 그리고 영원한 쉼터이자 안식의 처소이다.

이제 그 산은 한국 민주주의를 키우는 자양으로 역할을 할 것이다. 또 그 산으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혼령들이 따뜻하게 위로와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한 번 정도 다녀갈 산이기도 한다. 산은 예수나 석가에게도 위로받지 못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던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존재이다. 그들에게 산은 새들과 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숨어서 살풋한 웃음 머금는 이름 모를 꽃들이 건네주는 위로를 통해 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山)…….

산은 정상을 뜻하지 않는다. 산은 가치의 대상이 아니므로 높다, 낮다, 멋지다, 의연하다, 장중하다, 멋있다, 별로더라, 저 산보단 못하더라, 낙원이다…… 등 인간의 언어로 담아서는 안 된다. 자연의 일부인 산에 삶을 의지해 살아가는 우리는 산을 보호 대상으로 여기지만 저 산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을 모른 채 땀흘리며 오르며 내려올 때는 철학자가 되어 온다.

산은 우리가 보고 느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감추고 은밀히 속삭인다. 산이라는 언어는 보라빛 칡꽃으로, 걷어 차이는 돌멩이로, 뿌리를 드러낸 나무로, 차가운 눈조차 기꺼이 품으로 받아들이고, 비와 눈의 자식인 얼음조차도 안아 주는 존재이다. 산은 작열하는 태양도 쉬게 해 주고 빛과 어둠의 그림자도 산에 안길 때만은 순한 어린 아이가 되어 어머니의 품이듯 안긴다. 낮은 산은 새소리로 위안을 받고 높은 산은 불어오는 바람 소리로 위로를 받는 것으로 넉넉한 웃음을 건넨다.

 

 

//// (1)

산은 민주주의와 닮아 있어서 좋다. 산은 누구나 오를 수 있고 안길 수 있다. 하지만 산 속에 담긴 산의 은밀한 언어는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의 민주주의라는 산은 삶과 동일한 가치로 인식하고 바라보았을 때 자유의 언어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산은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꿈꾸게 하는 존재이다. 민주주의의 정치는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고 찾아가는 산이다.

 

//// (2)

산은 그 나라 사람들을 닮은 것이 아니라 그 나라 사람들은 그 산을 닮아가며 살아간다. 자연이 말하는 것을 석가와 가섭의 경우처럼 산을 통해 알 수 있는 날... 이 산이 저 산이고 저 산이 이 산이라는 진리를 깨우치는 날, 나는 산에 안겨 있으리라.  한 마리 새처럼.

……산에 가고 싶다.